작업일지/회사에서 만난 사람

첫 번째 빌런 - 사라지는 자, H

(일)복이 터진 일개미 2022. 11. 17. 00:21

첫 직장이었던 S 화학회사의 사람들은 대체로 온화했다.

성격이 급해서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도 있고,

느긋하지만 꼼꼼한 사람도 있는 일반적인 직장의 모습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정 수준 안에서 급하거나 느긋했을 뿐,

성격이 폭급하여 사람을 쥐잡듯 잡지도,

오늘의 할일을 내년으로 미루지도 않았다.

대충 표준정규분포를 따랐다는 말이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첫 빌런, H차장을 제외하면 말이다.

 


 

9 to 6의 근무시간을 준수하던 S 회사의 출근시간은 암묵적으로 8시 반까지였다.

고일대로 고인 회사에 다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업무시간 30분 전에 와서 주운비를 해야지 주운비르을!!!!

 

이라는 아주 익숙한 논리 때문이었다.

15분? 하하하! 우린 30분이다 애송아!

 

그래도 다들 별다른 불만은 없었는데,

미리 연락만 제대로 하면 개인 사정에 따라 약간의 조정은 가능했고

근태관리가 아주 빡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영업조직이 그러하듯이,

숫자가 인격이라는 굳은 믿음하에 하루하루 매출실적에 쪼이는데

남이사 자리를 비우건 말건 돈만 벌어오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H차장은 달랐다.

그는 8시반에 출근하고 30분 이내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비유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9시부터 11시 사이에 사무실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은

일주일에 하루가 채 되지 않았다.

 

11시에 나타나 한시간정도 메일을 읽고,

점심을 먹고 난 다음 두시가 되면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네시쯤 돌아와 또 메일을 읽고,

저녁에 퇴근을 했다.

 

그렇게 하루 네시간동안

그는 회사 앞 편의점 의자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광합성을 하거나 통화를 하곤 했다.

 

가히 신선과도 같은 풍모였다.

월 마감은 내년에 해야겠구나 껄껄껄...

 


 

이 얘기를 하면 다들 진위를 의심하며 묻곤 한다.

 

혹시 사내정치에서 밀린 짬차장이냐?

로얄이냐?

따돌리느라 업무를 안줘서 그런거 아니냐?

영업은 기가막히게 해서 손을 안댄거냐?

4시간동안 8시간어치 업무를 하는거 아니냐?

 

애석하게도 전부 아니었다.

 

그는 부장진급을 노리는 차장이었고,

로얄패밀리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인물이었으며,

진급을 위해 주요거래선을 맡은 사람이었다.

 

영업실력.....업무처리.....

Hㅏ.................

 

그것이 완벽했다면 나는 H를 신으로 모시고,

하루에 다섯번씩 그의 자리를 향해 절을 했을 것이다.

차장은 위대하다! H차장 아크바르!

 


 

절은 커녕 빠른 손절이 답임을 깨닫는동안,

H의 거래선 담당자는 나와 급속도로 친해졌다.

 

차장님이 연락이 안되시네요....

 

로 시작되는 통화를, 하루에도 몇번씩 해댄 결과였다.

 

그와 일한지 한달이 지나고,

나는 그의 모든 거래선 담당자와 알게되었고,

그 거래선의 오더를 처리했으며,

H를 기다리다 지친 팀장님의 모든 업무지시를 때려맞아야 했다.

 

(조직개편으로 팀 구성이 바뀌고 사람들이 떠나가,

팀에서 실제 영업을 해본 사람은 H와 나 둘뿐이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갔고,

나는 2년차 주제에 플라스틱의 화학식부터

수출입, 매출, 손익, 연간 계획까지 모두 섭렵한

가성비 혜자 슈퍼노비가 되어있었다.

 

이게 다,

매일 자정을 위협하던 퇴근시간을 줄여보고자

미친듯이 일하게 만든 H덕분이라 생각한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의 아웃룩에 표시된

14,000통의 읽지 않은 메일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니가 사람이냐...